이럴까 저럴까 게으르게 미루고 있다가, 작년 9월 이후 처음으로 미장원에 다녀 왔다. 현금 $16 주고 어깨까지 닿던 머리를 귀밑으로 짧게 잘랐다. 이젠 나이가 들어선가, 머리 분위기를 획기적으로 바꾸어도 내 모습이 크게 달라 보이질 않는다. 그저 여전히 나네... 싶다. 미장원 의자에 앉아서 커다랗게 난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 풍경만 내내 보다 왔다. 이젠 심지어 그리 싫어 하던 한국 미장원 마저 그립구나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 이맘때는 새로 시작한 가을 학기가 한창 중반으로 접어 들면서 정신없어 진다. 최근에 맡은 트럼펫과 알토 색소폰 반주 악보를 오늘에서야 다 받은 터라, 사실 내일부터 나 역시도 눈코뜰새 없이 반주연습에 바빠질 참이다. 그런데도 오늘밤은 슈스케 5를 보고 나서 유튜브 플레이 리스트로 성시경을 틀어 놓고 맥주 한 병으로 시간을 정리 하는 여유를 부려 본다.
꼼지도 가을을 타는지, 퇴근해 집을 들어 서며 일없이 '우울해...'를 반복 하였다. 삶의 모퉁이마다 문득 문득 드는 생각, '사는 게 뭔가, 뭘 위해 이리 바둥 바둥 사나'란 화두는 그에게나 나에게나, 이십 때나 지금이나 사라져주질 않는 듯하다. 뭐든 오래 묵으면 본래의 실체는 사라지고 그저 자연의 한조각처럼 다 거기서 거기 같은 비슷한 형질로 바뀌는 것 같다. 나와 꼼지도 이젠 같은 장 항아리서 오래 묵어 가는 동치미가 되어 가는 걸까. 미움과 상처보단 애틋함과 연민으로 깊은 국물맛을 들여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 겨울이 다가오면 그 풍미가 더 깊어질까.
사람의 관계란게 시간을 쌓아 가며 변치 않으면 그 깊이란게 한정없이 나아가는 것 같다. 몇십년 된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당할 주변의 사람들이 영 생기질 않는다. 관계라는게 노력한다고 비슷하게 만들어지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이제는 포기 하고 산다. 심지어는 십년 전 미국에 와 초창기에 맺었던 사람들과 요 몇년 사이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도 비교할 수조차 없을만큼 차이가 난다.
내가 살면서 나도 모르게 쳐온 울타리 때문도 물론 있겠지. 사람들에 대한 관계 문제를 접어가는 나날들이다. 시도보단 포기가 많고, 다정보단 무관심이 상대방을 더 편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가는 나날이다. 특히나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는 더 그런 것 같다. 이젠 왜 그럴까를 생각하는 것조차 불필요하다고 느낀다. 타국에서의 십 년 세월이다.
꼼지를 제외하면 중학교 친구인 시카고 주황이에게 온 마음을 다 주고 의지 하는 요즘이다. 그 애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식구들을 부여잡고 사는 미국 생활. 그래도 살림 싫어 하고, 하릴없는 선비 같은 일상을 추구하는 나에게는 복된 생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사람에 연연치 말고 내가 배우고, 하는 일에 더욱 정진할 일이다.
11월부터는 벼르고 별러 오던 비올라 레슨을 받기로 했다. 이왕 하는 거 비올라를 전공 할 수준까지 도전해 보고 싶다. 돈들여 배우는 걸 대충 대충 시간 때우기로 배우고 싶지는 않다. 열심히 배워서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면 현악기로 뭔가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보고 싶다. 아, 하고 싶은게 아직도 많구나^^
최근, 손가락 관절염이 좋아졌으니, 이제 기타와 첼로도 다시 시작해봐야 할텐데. 반주 일정이 자리를 잡으면 시간을 내어 봐야지. 남들로부터 거둔 시선을, 다시 나에게로 돌려 보자고 다짐해본다.
성시경 목소리가 어울리는 가을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