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더라도 다른 친구들에게 자랑은 말아. 너도 힘든 날들을 보내고 이제 편하게 사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힘든 일 겪는 애들에 대한 예의는 아닐 것 같아."
정확히 이렇게 말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내 기억 속에 남은 말이라고 해야 맞겠다. 왜 이 말을 했는지, 그 뜻과 의도를 알겠다. 적어도 안다고 생각했다. 근데도, '그걸 꼭 내게 말해줘야 할만큼 내가 철없고 부족해 보였구나,' 마음이 섭섭했다. '왜 그러면 안돼?'란 반항의 맘도 차올랐다. 그리곤 생각해 보았다. 내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누군가 내 맘을 알아 줄때 반항심은 작아진다. 누구보다도 내 맘을 알아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내 맘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을때 반항심은 커진다. 엄마로서 하늘 바다를 대하면서도 늘 느끼는 점이다.
엄마로서 내가 특히 자주 범하는 잘못이기도 하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아이들을 다독거려주고 이해해 주는 단계를 생략해 버리곤 하는 거다. 그리고 그 단계를 생략한 후에 남는 건 잔소리와 야단의 말 뿐이다. 또 너무 가까워서,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아이의 행동을 믿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직 하지도 않은 행동에 대해서 주의를 주거나 성급한 질책을 하기도 한다.
많이 사랑하고 정말 가까우니까 더 잘 이해해 주고, 다독여 줄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반대일 때가 많다. 상대가 원하는 건, 그리고 반항심을 줄여주고 자신감과 자부심을 북돋는건,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헤아려주는데서 시작되는 건데 말이다.
내가 엄마에 대해 가장 고맙게 생각하고, 엄마에 대해 가장 그리워하는 기억들도 나를 믿어주고 다독여주던 엄마의 말과 응원이었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절절히 깨닫는다.
'어구, 우리 딸 얼마나 힘들었니'
'어구, 우리 딸이니 얼마나 잘하겠니'
'어구, 그랬구나. 네가 어련이 알아서 잘 했겠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맞을 꺼다'
내가 기묘의 사소한 한마디에서 받은 섭섭함이 이렇다면, 나의 친구들도, 내 가족들도, 내 주변의 사람들도 나에 대해 섭섭함을 느낄 때가 많을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주는 상처가 나에게 다시 상처가 된다는 거 이젠 잘 알아서 후다닥 나 자신부터 반성하게 된다. 곱씹음과 반성을 거듭해도 갈길은 여전히 멀어 보인다.
특히, 내가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서운함은 상대가 다시 나의 맘을 두드려주지 않는 이상 혼자서 스스륵 풀리거나 하진 않는 것 같다. 그래도 가족이나 내 아이들은 매일 매일 볼 수 있으니 풀고 화해하고 고치고 노력할 기회가 있다. 하지만, 사십이 훌쩍 넘어 언제 다시 볼지, 언제 다시 목소리라도 듣게 될지 알 수 없는 친구들은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뭔지 모를 서운함과 아쉬움과 슬픔들이 뒤섞인 감정의 잔향이 더 오래 남을 것 같다.
2월이 막바지로 가는 이번주 내내도, 이곳은 기온 영하 10도, 체감 온도 영하 20도를 오락 가락 하고 있다. 그래도 창으로 들어 오는 햇빛은 전보다 다정해진듯 하다.
봄이 오기는 오려나.
참으로 길고 혹독한 계절이다. 이 동네 사람들도 겨울잠에 빠진듯 움직임이 미약하다. 그 어디도 북적이지 않는 동네가, 이번 겨울을 지나며 더 고요해진 것 같다. 눈과 얼음으로 덮힌 몇 개월이 천천히 간다.
날씨 때문에 렛슨과 연습이 취소되는 날도 많고, 한 삼십정도 떨어진 동네 학원에서 하던 렛슨도 지난 몇달 동안 중단된 상태다. 학생들 반주도 3월까지는 아직 특별히 잡힌게 없다. 간혹 전화가 오긴 하지만, 확실히 정해진건 아직 없다.
이런 한가함을 즐기는데 이젠 조금 익숙해진 것 같다. 특히, 정신없는 솔로 앤 앙상블을 끝낸 후엔 이 시간을 휴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도 악기 연습은 계속한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지는 않는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오전엔 여유부리면서 커피로 정신을 챙기고 컴퓨터도 하고 일기도 쓰고 집안 일도 하면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12시 정도가 되면 제대로 배를 채우고 피아노 앞에 앉거나 비올라 연습을 한다.
미국 작곡가 Creston의 알토 색소폰 소나타. C Major 이고 듣기에 편하다는 이유로 우습게 보면 큰코 다칠 곡이다.피아노 부분이 장난아니게 어렵다. 임시표가 무한대로 나오고 3연음과 옥타브 화음이 쉼없이 이어진다. |
3월에 고등학생 주(State) 경연에 반주할 Paul Creston 의 알토 색소폰 곡이 주된 연습 대상이다. 지난 학기에 UM-Flint 학생 반주로 했던 곡이긴 하지만, 워낙 곡이 어려워서 여전히 차근 차근 손을 보고 있다.
그 외에는 주로 손가락힘과 독립성을 좀 더 길러야 해서 쇼팽의 연습곡들 몇 곡을 집중적으로 치고 있다. 역시 쇼팽의 연습곡은 최고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특정 몇몇 곡을 연습하고 나면 소리도 훨씬 강력해지고 손가락의 유연성도 확연히 달라지는 걸 느낀다. 예술적인 면에서도 고등학교 이후 몇십년을 쳐도 질리지 않는다. 연주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과 더불어 화음변화의 섬세한 면면에 여전히 감탄하게 된다.
그러다 힘이 빠지거나, 게을러지고 싶으면, 가요도 듣고, 영국판 셜록 홈즈 드라마도 보고, 한국책도 읽고, 영어책도 이것 저것 손을 댄다. 간혹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방문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변함없는 행보와 꾸준한 책읽기, 글쓰기에 혀를 내두르고 돌아 온다.
그 누구도, 그 누구의 행복과 불행을 재단할 수 없다. 또 행복과 불행, 복과 저주는 따로가 아니다. 그것들은 늘 '따로 또 같이'다. 나의 행복한 시간에는 불행의 씨앗이 함께 했고, 내 불행했던 순간에는 행복이 새로 싹을 틔우고 자라났다.
그 누구도, 그 누구의 행복과 불행을 바꿔 줄 수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건, 곁에 있어 주는 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거, 응원의 말과 마음을 나워 주는 거 그런것들 뿐이다. 그것들에 힘입어, 자기 스스로, 행복은 더 튼튼해 지도록, 불행은 행복의 밑거름이 되도록 만들어 가야 한다.
하늘 바다가 학교에서 돌아 왔다. 이제 아이들에게로 돌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