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6일 수요일

길고 긴 겨울

5월 여행에 대한 의논도 할겸, 정말 오랜만에 (얼마만인지도 모르겠다) 통화한 기묘가 말했다.

"여행 가더라도 다른 친구들에게 자랑은 말아. 너도 힘든 날들을 보내고 이제 편하게 사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힘든 일 겪는 애들에 대한 예의는 아닐 것 같아."

정확히 이렇게 말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내 기억 속에 남은 말이라고 해야 맞겠다. 왜 이 말을 했는지, 그 뜻과 의도를 알겠다. 적어도 안다고 생각했다. 근데도, '그걸 꼭 내게 말해줘야 할만큼 내가 철없고 부족해 보였구나,' 마음이 섭섭했다. '왜 그러면 안돼?'란 반항의 맘도 차올랐다. 그리곤 생각해 보았다. 내가 느꼈던 감정에 대해서.


누군가 내 맘을 알아 줄때 반항심은 작아진다. 누구보다도 내 맘을 알아주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내 맘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을때 반항심은 커진다. 엄마로서 하늘 바다를 대하면서도 늘 느끼는 점이다.
엄마로서 내가 특히 자주 범하는 잘못이기도 하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아이들을 다독거려주고 이해해 주는 단계를 생략해 버리곤 하는 거다. 그리고 그 단계를 생략한 후에 남는 건 잔소리와 야단의 말 뿐이다. 또 너무 가까워서,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해서, 아이의 행동을 믿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직 하지도 않은 행동에 대해서 주의를 주거나 성급한 질책을 하기도 한다.
많이 사랑하고 정말 가까우니까 더 잘 이해해 주고, 다독여 줄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반대일 때가 많다. 상대가 원하는 건, 그리고 반항심을 줄여주고 자신감과 자부심을 북돋는건,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헤아려주는데서 시작되는 건데 말이다.

내가 엄마에 대해 가장 고맙게 생각하고, 엄마에 대해 가장 그리워하는 기억들도 나를 믿어주고 다독여주던 엄마의 말과 응원이었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절절히 깨닫는다.

'어구, 우리 딸 얼마나 힘들었니'
'어구, 우리 딸이니 얼마나 잘하겠니'
'어구, 그랬구나. 네가 어련이 알아서 잘 했겠니'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맞을 꺼다'

내가 기묘의 사소한 한마디에서 받은 섭섭함이 이렇다면, 나의 친구들도, 내 가족들도, 내 주변의 사람들도 나에 대해 섭섭함을 느낄 때가 많을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주는 상처가 나에게 다시 상처가 된다는 거 이젠 잘 알아서 후다닥 나 자신부터 반성하게 된다. 곱씹음과 반성을 거듭해도 갈길은 여전히 멀어 보인다.
특히, 내가 믿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서운함은 상대가 다시 나의 맘을 두드려주지 않는 이상 혼자서 스스륵 풀리거나 하진 않는 것 같다. 그래도 가족이나 내 아이들은 매일 매일 볼 수 있으니 풀고 화해하고 고치고 노력할 기회가 있다. 하지만, 사십이 훌쩍 넘어 언제 다시 볼지, 언제 다시 목소리라도 듣게 될지 알 수 없는 친구들은 상황이 다르다. 그래서 뭔지 모를 서운함과 아쉬움과 슬픔들이 뒤섞인 감정의 잔향이 더 오래 남을 것 같다.


 2월이 막바지로 가는 이번주 내내도, 이곳은 기온 영하 10도, 체감 온도 영하 20도를 오락 가락 하고 있다. 그래도 창으로 들어 오는 햇빛은 전보다 다정해진듯 하다.

봄이 오기는 오려나.

참으로 길고 혹독한 계절이다. 이 동네 사람들도 겨울잠에 빠진듯 움직임이 미약하다. 그 어디도 북적이지 않는 동네가, 이번 겨울을 지나며 더 고요해진 것 같다. 눈과 얼음으로 덮힌 몇 개월이 천천히 간다.


날씨 때문에 렛슨과 연습이 취소되는 날도 많고, 한 삼십정도 떨어진 동네 학원에서 하던 렛슨도 지난 몇달 동안 중단된 상태다. 학생들 반주도 3월까지는 아직 특별히 잡힌게 없다. 간혹 전화가 오긴 하지만, 확실히 정해진건 아직 없다.
이런 한가함을 즐기는데 이젠 조금 익숙해진 것 같다. 특히, 정신없는 솔로 앤 앙상블을 끝낸 후엔 이 시간을 휴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도 악기 연습은 계속한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지는 않는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오전엔 여유부리면서 커피로 정신을 챙기고 컴퓨터도 하고 일기도 쓰고 집안 일도 하면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12시 정도가 되면 제대로 배를 채우고 피아노 앞에 앉거나 비올라 연습을 한다.
미국 작곡가 Creston의 알토 색소폰 소나타. C Major 이고 듣기에 편하다는 이유로 우습게 보면 큰코 다칠 곡이다.피아노 부분이 장난아니게 어렵다. 임시표가 무한대로 나오고 3연음과 옥타브 화음이 쉼없이 이어진다.

3월에 고등학생 주(State) 경연에 반주할 Paul Creston 의 알토 색소폰 곡이 주된 연습 대상이다. 지난 학기에 UM-Flint 학생 반주로 했던 곡이긴 하지만, 워낙 곡이 어려워서 여전히 차근 차근 손을 보고 있다.
그 외에는 주로 손가락힘과 독립성을 좀 더 길러야 해서 쇼팽의 연습곡들 몇 곡을 집중적으로 치고 있다. 역시 쇼팽의 연습곡은 최고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특정 몇몇 곡을 연습하고 나면 소리도 훨씬 강력해지고 손가락의 유연성도 확연히 달라지는 걸 느낀다. 예술적인 면에서도 고등학교 이후 몇십년을 쳐도 질리지 않는다. 연주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과 더불어 화음변화의 섬세한 면면에 여전히 감탄하게 된다.


그러다 힘이 빠지거나, 게을러지고 싶으면, 가요도 듣고, 영국판 셜록 홈즈 드라마도 보고, 한국책도 읽고, 영어책도 이것 저것 손을 댄다. 간혹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방문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변함없는 행보와 꾸준한 책읽기, 글쓰기에 혀를 내두르고 돌아 온다.

그 누구도, 그 누구의 행복과 불행을 재단할 수 없다. 또 행복과 불행, 복과 저주는 따로가 아니다. 그것들은 늘 '따로 또 같이'다. 나의 행복한 시간에는 불행의 씨앗이 함께 했고, 내 불행했던 순간에는 행복이 새로 싹을 틔우고 자라났다.
그 누구도, 그 누구의 행복과 불행을 바꿔 줄 수 없다. 다만 할 수 있는 건, 곁에 있어 주는 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거, 응원의 말과 마음을 나워 주는 거 그런것들 뿐이다. 그것들에 힘입어, 자기 스스로, 행복은 더 튼튼해 지도록, 불행은 행복의 밑거름이 되도록 만들어 가야 한다.

하늘 바다가 학교에서 돌아 왔다. 이제 아이들에게로 돌아갈 시간이다.

2014년 2월 10일 월요일

2014 솔로 앤 앙상블 지역 경연

고등학교 9-12학년 나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미국 공식 지역별 악기 경연이 지난 토요일에 열렸다. 음악교육에서 악기 교육과 연주 교육을 대단히 중요시 미국은, 솔로 앤 앙상블 (Solo & Ensemble) 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전역에서 2월에는 지역 대회 (District Solo & Ensemble) 를 3월에는 주 대회 (State Solo & Ensemble) 를 해마다 개최한다.

지역 경연의 독주 부문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피아노 반주자를 반드시 대동해야 한다. 그래서 1월 말 경이 되면 우리 지역, 미시건 3구역의 고등학교 학생들로부터 반주 요청이 온다. 올해에는 총 여섯 학생들이 나에게 반주 요청을 해 왔고, 경연 당일이었던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그들의 일곱개의 경연을 반주 하게 되었다.

학생 수보다 경연 수가 많았던 이유는 한 학생이 하나 이상의 독주 경연에 참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나에게 반주를 부탁한 인도계 학생 애니샤 (Anisha) 가 올해에는 플룻과 바이올린 두 악기에 참여 했다. 작년보다 많은 수의 반주를 하게됐지만, 다행히 하늘이 바다가 이번엔 둘 다 바하의 무반주 곡들을 연주한 바람에 내 도움이 필요 없어서 내가 맡은 다른 학생들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바다, 피아노,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K.545, 2악장 연주
대기실 풍경

모든 경연이 학부모를 비롯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하늘 연주 듣는 중.

하늘, 바흐, 무반주 첼로 1번. 연주 후 심사위원이 조언이나 짧은 가르침을 주고, 1-5급으로 평가를 한다.

바다, 바흐 바이올린 파르티타 3번 가보트와 론도.
부분별로 여러명의 심사위원들이 있는데, 하늘 바다는 같은 분이었다.

경연이 있던 주의 날씨는 최악이었다. 특히 학생들 네 다섯 명과 연이어 연습이 잡혀 있던 수요일에는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결국 낮에 잡혀 있던 UM-Flint (미시건 대학, 플린트) 성악과 학생의 렛슨 반주에는 갈 수조차 없었다. 차를 몰고 집을 나섰는데, 집앞 도로에 들어서기도 전에 차가 눈속에 처박혀 꼼짝을  안하는 거였다. 다행히 학교버스를 타고 돌아온 바다와 함께 차 밑의 눈을 치우고 겨우 밀고 땡기는 소란을 한 시간이 넘에 벌여서야 겨우 차를 다시 차고에 넣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경연 당일 날 날씨 는, 춥기는 했지만 아주 나쁘진 않았다. 정식 피아노가 아니라 전자 피아노에서 손을 풀 수 있는 기회도 전혀 없이 여러명 학생들의 각기 다른 음악을 반주하는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경우, 하늘이와 바다를 반주해 주느라 이 경연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본건 몇 년 됐지만, 정식으로 보수를 받고 다른 학생들을 반주해 준건 올해로 두 번째다.

작년 보다는 좀 덜 긴장하고, 아주 조금은 익숙해 진것도 같다. 심지어 이번에는 사전 연습도 없이 연주 당일날 만나 갑자기 반주를 해주는 용기를 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학생들이 연주 결과로 등급을 받기 때문에, 가장 잘한 1급을 받지 못할때면 괜스리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경연에선 반주자로서 최악의 조건으로 연주를 해야 한다. 추운 날씨에 각 방 별로 불안정하게 준비된 디지털 피아노에서 건반 한번 만져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때 그때 학생들을 찾아가 연주해야 하는 거다.

이번엔, 애니샤의 곡,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in A minor 1악장을 연주하는데 디지털 피아노 밑에 스티커로 고정된 임시 페달이 계속 앞쪽으로 밀리는 일이 있었다. 꽤 길고 쉽지 않은 곡인데다가 애니샤의 일정하지 않은 박자를 맞추는 것만으로도 정신인 없는 와중에,  곡을 시작한 직후부터 페달은 자꾸 내 발밑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누를 때마다 밀려나는 페달을 쫓아 다리를 계속 뻗어야만 했다. 결국 곡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페달은 아무리 발을 뻗어도 다리가 닿지 않는 곳까지 가버리고 마지막 몇마디에는 페달 울림 없이 마무리 해야만 했다.

어쩌면 페달의 방향이 반대로 놓여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에도 전자 피아노의 임시페달이 불안정해서 연주 시작전에 꼭 확인해 보곤 하는데 이렇게까지 페달이 협조를 안해준 건 또 처음이었다.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려니 싶다. 이런 점에서도, 이 대회를 위한 더 나은 반주자가 되는 데는 충분한 사전 준비와 실력 뿐만 아니라 오랜 경험과 경륜이 필수적이겠다 싶다.

꼼지와 얘기를 나누면서 이번 경연에서 반주자로서 내 역할에 대한 전체 점수를 매겨 보았다. 함께 동의한 점수는 79.5점, 반올림 해서 80점이다^^. 좋은 점수는 아니지만, 지난해 보다는 분명 나아졌다고 믿는다. 계속 계속 하다보면, 학생들과의 교류와 연주를 모두 좀 더 즐기고 스스럼 없이 좋은 점수 또한 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멈추지 말고, 계속 헤엄쳐~"


2014년 2월 4일 화요일

설 안부

난 철학자 강신주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 그 사람이 오늘 힐링캠프에 나왔다. 요즘은 한국 프로그램도 잘 안보는데 - K-pop 스타 외에는 - 꼼지가 보고 있던 걸 보다 보니 끝까지 보게 됐다.

다 보고 나서 두 가지가 나에게 남았다.
하나는 능력이나 성공은 '끈기'의 다른 말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사람은 죽어가는 걸 사랑한다는 것. 그래서 약하고 죽어가는 것에 사랑을 주는 법이고, 그때서야 사랑의 실체가 밝혀 진다는 것.

첫번째 끈기에 관한 말은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더 다가왔던 거 같다.
난 바랬다가 이루지 못한 것들이 타고난 능력의 부족이나 한계 때문이라고 여겨 왔다. 하지만 막상 자세히 들여다 보면, 능력보다는 끈기가 없어 원하던 일을 못하게 된 게 다반수였다. 끈기와 부지런함, 아니, 끈기 하나라도 제대로 붙잡고 될때까지 끈질기게 구하고, 준비하고, 노력한다면,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릴지라도, 뭔가 꼭 원하는 일이라면 이룰 수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는 것, 그러다보면 된다는 걸 내 자신이 좀 더 잘 기억하고 추구했음 싶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감이 없어지고 몸이 처진다는 게 복병이다.

두번째 사랑에 관한 강신주에 말이 인상 깊었다.
사랑, 사랑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나라는 좋은 나라고 사랑을 막고 어렵게 많드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사회의 구조나 개인적 상황이 '사랑 나누기'를 어렵게 만든다고 사랑을 포기 해야 할까.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계속 해야 한다. 그 사랑이 자꾸 자꾸 퍼져 나가도록 해야 한다. 사랑과 자유를 통해서야만 인간은 오롯이 행복하고 성숙해질 수 있으니까.

강신주의 사랑론에 대해 들으면서 나의 '사랑하기'를 곱씹게 되었다.

설이 와서 아버지께 안부를 전해야 했다. 전해야 하니까 하는 건지 전하고 싶어서 하는 건지, 딱 반반이라 어느쪽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이 두 가지가 단단히 합쳐친 하나의 마음으로, 대게 '잘있냐? 나도 잘있다. 됐다. 알았다"로 끝나고 마는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는 접기로 하고, 간단히 이메일을 쓰기로 했다.

보통 이메일을 쓰는 건 내가 가장 편하게 쉽게 잘 할 수 있는 거다. 술술술술~ 별 막힘없이 상대방에게 할말을 하거나 마음을 전하는 편이다. 아버지에게 일없이 안부 편지를 쓰려는데 막막했다. 늘 엄마가 도맡아 하시던 제사나 차례를 십년전(...)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집안의 맏이인 아버지 혼자 치르신다. 물론 친척들이 온다고는 한다. 하지만 그 설명절에, 준비를 잘 하시라느니, 누가 오실꺼냐느니, 어디서 지내실꺼냐느니, 오빠는 어떻게 되냐느니.... 등등의 아버지에 대해 내가 궁금한 걸 여쭈어 보는 방향으로 쓰려니 한 자도 쓸 수가없었다. 멀리 있는 무심한 자식이, 그딴 거 물어서는 뭣하며, 그거에 대한 아버지의 답이라는 게 뭐 딱히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 나역시도 묻기는 묻되, 들어도 그만 안들어도 그만인 것들 아닌가 싶어 부질없게 느껴진 탓이다.

문득, 차라리 아버지 입장에선 우리 얘기가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겠지 싶었다. 그쪽으로 풀어 보려니 짧은 편지나마 써지기 시작했다. 단, 감정을 길게, 그리고 깊게 잡고 쓰지 않기로 했다. 그냥 단편적으로, 가볍게, 쓰기로 했다. 나의 아버지의 사랑이 현재 딱 그만큼인 정도로만. 과장하지도 말고 확대하지도 말자. 아버지와 간단한 소식을 주고 받고 대화 하면서, 엄마의 영원한 부재 이후에야 맞딱드리게 된 아버지와 나 사이의 사랑이란 걸 조금씩이나마 이어가면 되는 거지 하는 마음인거다.

이런 아버지와의 사연 속에서, 마침, 오늘 강신주씨가 얘기 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법이라고.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니 내가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듣는 걸 제일 좋아하시겠지.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안부가 아니라 내 소식을 전하는 편지를 쓴 건, 잘 한 선택이었군. (하고 좋게 생각 하기로 함....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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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한국은 설이지요? 잘 보내시기 바랄께요.
한국은 날씨가 좀 풀린것 같다던데 여긴 계속 추위가 이어지고 있어요.
아이들 학교도 몇일씩 쉬고 그랬지요.
날씨가 추운것 외에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아이들도 하늘 아빠도 다 잘 있고요.

지난주에 하늘아빠 후배가 한 일주일쯤 일때문에 와서 지내다 갔어요.
이번 주말엔 하늘아빠 아는 사람의 아들 둘이 와서 몇일 지내다 갈꺼라네요.
하늘 아빠와 저는 일이 조금 바빠 졌어요.

저는 가르치는 학생들과 피아노 반주 하는일이 조금씩 늘고 있어서 전보다는 조금 분주 하네요.
이곳에서 지내는 횟수가 길어지니 일도 조금씩 느는거 같아요.

하늘이는 자동차를 살 생각에 빠져 있고 바다는 축구를 너무 좋아해서 집에서도 늘 축구만 한답니다.

애들이 더 컸어요. 먹는것도 더 많이 먹구요.

설이라 언니도 아버지도 여러가지로 분주 하실것 같네요.

건강 유의 하시고 잘 지내시기 바랄께요.
저희도 건강하게 잘 지내도록 할께요.

미시건에서 막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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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 놓고 다시 보니, 정말 진저리치도록 딱 고만큼이네 하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이 안부편지에서 아버지께 들려드리는 나의 소식에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관계 회복 또는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사랑의 시작이라 부를 수 있다면) 사랑의 진행이 이만큼 인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언니에게도 이 이메일을 참고로 보냈다. 언니가 답장을 보내왔다.
언니는 나와 마찬가지로 종교라든가 뭐 그런, 정신적 의지처(? 돌아가신 엄마 외에^^;) 없이 사는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어느것에도 그리 의존적이지 않은). 그저 나처럼, 음악 좋아하고, 영화, 연극 (이런 건 내가 언니한테 받은 영양일테지만) 이런 문화 활동을 강장제 삼아 사는 사람이랄까. 그런 점에선 나와 비슷하지만, 그래도 언니는 나와 다르게 일과 가족,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 등등을 다 챙기며 밝게 산다. '조울증'의 경계에서 늘 간당거리며 사는 나와는 다르다. 왜 다른 건지 가끔 의아하기도 하다. 그 에너지의 원천은 무얼까. 어쨌든 언니는 나에게는 세월이 갈 수록 살아 있는 존경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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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야~

일요일 보이스톡 통화해서 반가웠어.  아버지 계실 때 연결되어 더욱 좋았고... 4일 연휴였는데도 바쁘게 보내서 금방 지나가서 아쉽다. 4일간 내 일정을 적어 보았어.

목요일 :


아침 먹고 치우자 마자 대치동 큰집 가서 음식 장만, 점심/저녁 먹고, 수다 떨고... 와인 마시고... 밤에 잠이 잘 안
와서 설쳤어.

금요일 :


새벽잠 자서, 6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7시에 깨서 차례 준비.
거의 8시30분 ~9시에 차례에 시작하고, 아침 떡국 먹고.  설거지 못하고 친정 행.
11시 넘어 아버지 댁 도착해서, 둘째 작은아버지 내외분, 막내 작은아버지, 범진 내외와 아들(호담 4세), 성진
내외와 아들(호진 6세) 만나 세배하고 인사 나누었다.
2시30분 연희동에서 대치동   3시40분경 대치동 도착하니 막내 혜정 아가씨 가족 와 있어서 모두 함께 둘러 앉아

노래 불렀어.(아주버님 기타 반주에 맞춰... 돌림노래도 하고, 레크레이션 하 듯 손뼉도 돌아가며 ...)
잠시 후 큰시누 명아 아가씨 내외 도착. 저녁 상 차려서 이야기 꽃.
이번에는 아이들도 대화에 함께 참여해서 더욱 좋았어.
시누들 떠나고, 남아서 남은 음식 더 먹고(음식 처리 ㅋㅋ) 조금 치우다가 11시 경 집으로 출발~!
그래미어워드 2014 재방송을 보려고 맘 먹었는데, 아마 하루 전 자정에 이미 재방송 했나 봐.  결국 못 보고...아쉽...

토요일 :


떡국 아점 먹고, 치현은 친구 만나러 나가고, 형부랑 사무실 출근.  3시반까지 일하고, 구로 CGV 무비꼴라쥬 관에서 하는 "인사이드 르윈" 영화 보고, 귀가. 비가 추적추적 내리길래 오는 길에 마트 들어 쪽파, 막걸리 등 사서 집에서 쪽파&김치전 안주에 막걸리. 형부는 양 안차서 나물 넣고 비빔밥도 먹고. 치현이는 친구들이랑 끝 없이 놀고, 영화 보고, 12시 거의 다 되어 귀가!


일요일 : 

9시 반 아버지께서 우리집 오셔서 아침 먹은 후, 파주 민들레 병원에 한진이 면회 감.
집 돌아와 점심은 낙지 볶음 해서 아버지와 함께 먹고, 아버지 가신 후, 좀 쉬고 저녁은 지수 환송회 : 돼지고기
목살 로스구이 & 잔치국수

월요일 :


새벽 4시 기상 5시 출발  5시 50분 인천공항 도착해서 지수와 친구, 승연이 배웅.  건강히 잘 다녀 오겠지.


연휴 인데도, 쉴 시간이 별로 없었어. 집안 일도 많이 못했는데...


네가 한국 오게 되면, 범진, 성진 등 사촌 형제들과 시간 잡아 한번 만나자.

성진, 범진에게 네 facebook 알려 줬어. 괜찮지?
이번 철용 일 당하고, 내가 너무 무심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철용인 고모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춘 동생이다. 몇일전에 뇌출혈로 황망하게 예고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만나지 못해도 연락은 하고 살아야 하는데...
이제는 가끔 연락하고 얼굴도 보고 살아야 할 것 같아.
너 오면 다 같이 한번 만나자 ~
열심히 즐겁게 살자~!

우리 자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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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형부와 작은 사업을 함께 운영하기 때문에 매일 매일 출근하고 저녁 늦게야 퇴근하는 생활을 오랫동안 계속해 왔다. 그 사이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고 결혼 한 얼마 후부터 함께 살아온 시어머니도 연세가 많이 드셨다. 시댁에선 지병을 앓다 돌아가신 큰며느리를 대신해, 형제가 많은 형부네 식구들의 맏며느리 역할을 다 맡아 해왔다. 그리고 언니를 둘러싸고 그 '모든 것'이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그런 언니의 2014년 설 연휴 이야기다.

여기에 더해, 중년에 이르도록 자립을 못하고 아픈 남동생 (나의 오빠) 도 이래 저래 챙겨 주어야 한다. 나는 다 놓고, 버리고 온 일들이다. 나는 계속 물러나 있는 일이다. 나 같으면 뛰쳐 나와버렸을 일이다. 언니는 그걸 다하면서도 능동적으로 산다. 삶에 끌려 살지 않고, 끝끝내 삶을 이끌며 산다. 언니가 나에게 엄마고 나에게 최고로 존경하는 사람인 이유다. 그리고 언니를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는 이유기도 하다.

미국에서 지나간 2014년 한국 설날 안부 이야기 끝.

DUNE 1 and 2

한국에서 Dune 1을 본게 아마도 나온 직후. 이유는 모르겠으나, 영화 예고편을 보자마자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라메라는 배우에 빠졌다. 부드럽고 섬세해서 유약해 보이기까지 하는 배우가 강한 카르스마까지 아우르니 그의 연기에 빠져들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