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0일 목요일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사의 철학' (2) - 서론

황지우의 번역이 좋긴 하지만 읽다 보니 원문이 뭔지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내가 독일어 원서를 읽을 능력은 없어서 영문본이라도 참고를 하기로 했다.

당장 킨들에 영어본을 사서 저장하였다. 서론부터 너무나 매력적이라 영문본을 함께 읽으며 혹시라도 생길지 모르는 곡해의 가능성을 줄이고 싶다.

한글본이 명료하지 않은 것 같을 때 영문본을 비교하며 가능한한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노력할 생각이다. 영문본 확인 후에 한글본을 내식대로 고치게 되면 영문을 달아 놓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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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예술 사회학의 목적과 한계 (The Scope and Limitations of a Sociology of Art)

*예술작품은 도전이다; 다다를 수 없는 고지

-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할 뿐; 우리 자신의 목적과 노력에 의존하여 해석; 우리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기반한 어떤 의미를 작품 속에 불어 넣는다

- 즉, 우리에게 [지금] 감동을 주는 예술은 그런 점에서 현대예술이 된다. [예술작품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 변하는 것이며, 이 자체가 예술의 속성일 것]

- 우리는 고지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를 선회; 각 세대들마다 다른 관점과 새로운 눈으로 예술작품을 본다; 작품의 양상은 각 당대에 모습을 드러내며 이를 예견하거나 연장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중대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 왜냐하면, 다음 세대에게 어떤 작품의 의미란 이전에 이루어진 해석의 총합체이기 때문이다. (the meaning that a work assumes for a later generation is the result of the whole range of previous interpretations.)

[작품의 중대성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현재 또는 미래 세대에게 어떤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가질 때 그것 자체가 이미 이전에 이루어진 모든 해석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라는 것]

*현대는 문화적 업적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하는 시대

- 통찰도 얻은 반면, 한계나 결점도 있다.

-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높은 정신적 가치들[작품의 위대성]이 생존, 계급갈등, 경쟁, 명성 등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 측면과 연결되면 언짢아 한다. (There are still people who do not feel quite happy when ...the higher spiritual values are in any way brought into connection with the struggle for existence, class conflict, competition, prestige, and the like.)

- 이런 견해를 여기서 다루면 [시간낭비] 일 것 같고; 다만 이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정신적인 것[작품의 위대성]을 물질적인 것이 배재된 것으로 다룬다면, 결과적으로 특권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Requiring the spiritual to be preserved from all contact with the material frequently turns out to be a way of defending a position of privilege.)

[예술작품에서 물질적 또는 사회적 측면을 배제한 추상적 고귀함만을 원한다면, 그건 결국 예술의 특권 또는 예술을 소유한 특정층의 특권 등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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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저는 "작품의 미적인 환상"이 예술작품의 전부도 아니며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유일한 목적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물질, 현실, 사회 등의 존재론적 측면을 배재하는 순수예술론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예술의 마력에 흠뻑 빠지려면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진정한 예술은.... 우회로를 통하여 우리를 궁극적으로 현실 세계로 인도한다.... 위대한 예술이란 우리에게 삶을 해석해 준다. 이 해석으로 우리는 사물의 무질서한 상태에 더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삶으로부터 더 설득력 있고 신뢰할 만한 의미를 [움켜쥘]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최종적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도 분명 읽었겠고, 예전에도 지금처럼 공감했을 거다. 오늘도 또 공감했다는 사실이 기쁜 거다.

하우저의 생각을 따르면, '예술은 삶의 도구'인 거다.

"문화는 사회를 보호하는 데 이바지한다" (Culture serves to protect society.)

즉, 문화의 하나로서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전제한다.

그리고 예술가는 "그의 모든 포부와 전망과 더불어 생계 전체가 하나의 사회집단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의도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고객과 후원인의 대변자가 되기 마련이다"

물론 여기서 핵심적인 변수는 '고객'과 '후원인'의 성격이다.

또한 정말 멋지게도 '우리는 우리 사고 안의 편향성과 끊임없이 싸우며, 비판적 태도를 통해 우리가 가진 견해의 일방성과 오류를 교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의 견해를 던진다.

서론의 제목처럼, 하우저는 예술의 목적 및 그 한계에 대해 다각적으로, 또 처절하게 다 까발리고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 같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싸우겠다는 것처럼.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삶과 죽음, 사회적 동물)가 결국 예술의 한계를 만든다. 그럼에도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예술작품이 멋진 것은 그 한계를 계속 깨보려 하는 그 시도(시지프스와 같은) 때문인 거다.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라는 그 말이 보잘 것 없이 들릴 수 있겠으나 그 한계가 결국 "문화사회학에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2022년 1월 18일 화요일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사의 철학' (1) - 머리말

나이가 들었으니 새롭게 다가오는 점이 있지 않을까 하여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사의 철학'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책 전체를 완독할 생각은 없고 관심이 가는 부분만 읽으려 한다.

대신 그만큼 머리와 맘속에 각인 되는 내용이 있었으면 싶다.

사실, 이 책을 다시 읽어보려는 것은 하우저가 한 말과 그의 연구를 외우고 싶어서가 아니다.

예술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싶어질 때 생겨나는 질문들을 다시 던져보고 싶어서다.

여전히 내 안에서 질문이 생겨난다면 좋겠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욕심 내지 않는 차원에서 오늘은 '머리말'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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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하우저(황지우 옮김)

'예술사의 철학', 돌베개, 1983.


머리말


*예술사의 방법론

- 학문으로서 예술사가 이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그것[예술사학]의 수단과 한계를 무엇인가.

[예술사를 해석의 문제라 할 수 있다면, '예술해석'을 위한 수단과, '예술해석'의 한계는 무엇일까]


*예술사

- 역사 현실; '역사적 과정'의 성격; '예술의 의미'망.

- 추상화 작업

[예술은 사회적이며 동시에 추상적이다. 즉 필연과 우연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론적 작용 역시 다시 또 필연과 우연에 따른다]

*역사의 모든 것은 개인이 이룩하지만 [필연]

- 개인은 시간, 공간 상으로 어느 특정한 상황에 갇혀 있기 마련 [필연]

- 생래적으로 타고난 능력과 상황의 산물 [필연]

=> 변증법적 역사이론에 기반. 신중하게 적용 필요 [필연+우연]

=> 즉, 양식은 변하며, 사회집단들과의 관계를 과도하게 강조하지 말 것. [우연]


* 어느 한 단계만으로 모든 단계의 방향을 결론낼 수 없다. [우연]

- 이전 단계를 알지 못하면 그 한 단계도 설명할 수 없고, 안다고 할지라도 예측 할 수 없게 된다.

['예술해석'에서 확신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다만 설명하고 예측할 뿐]


*인명없는 예술사; 민중예술과 대중예술; 예술사에서 관습의 역할

[인명없는 예술사란 것은, '무명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인가?; 민중과 대중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뜻?; 관습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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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하우저가 1978년에 생을 마감했으니 이미 오래전 사람이다. 그의 사후 50여 년 간 예술과 예술사상은 얼마나 변했는가. 그래도 철학이란 게, 개념이란 게, 원론적인 것이니 지난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고한 내용이 본질적으로 적용되는 부분이 있겠지.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마치 50년 동안 닫아 놓았던 상자를 다시 열어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022년 1월 17일 월요일

연습일상

민언니 덕분에 바흐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치게 된 건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평일에는 전 곡을 매일 치고 있다.

작년까지는 틈나는 대로 바흐의 '파르티타'를 익혔다면, 2022년 올해는 '평균율 Prelude & Fugue vol.1' 전 곡을 쳐보기로 했다. 오늘 현재 No.8.

베토벤 소나타 중 내가 좋아하는 곡들로 매일 1곡씩 치는 것도 추가 하였다.

쇼팽과 드뷔시도 가능한한 한 곡씩 치고 있다.

보통 하루에 한 2시간 정도 치는 것 같다.

이번 달에는 일상적인 피아노 연습을 가장 우선 순위에 둘 예정이다.



그래도 1월 중반이 되면서 조금씩 자리 잡아가는 것 같아 책을 읽을 공간을 마련했다.

하늘이가 독립해 나가고 나간 1층 창가 방을 어제 맘 먹고 재 배치하고 청소를 했더니 그럭저럭 쓸만하다.

그 기념으로 블로그에 기록.

매일을 소풍처럼.




DUNE 1 and 2

한국에서 Dune 1을 본게 아마도 나온 직후. 이유는 모르겠으나, 영화 예고편을 보자마자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라메라는 배우에 빠졌다. 부드럽고 섬세해서 유약해 보이기까지 하는 배우가 강한 카르스마까지 아우르니 그의 연기에 빠져들 수밖에 ...